
[포항=스포츠서울 김용일기자] “선수 생활 후회 없다. 감사하다.”
현역 시절 2010 남아공월드컵 16강 주역이자 최고 수준의 ‘멀티플레이어’로 활약, 지난해부터 지도자로 변신한 김정우(38) 인천 대건고(U-18) 감독은 이렇게 말하며 슬쩍 웃었다.
김 감독은 상무에서 군 복무 중이던 지난 2010년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돼 본선에서 4경기 모두 풀타임을 소화하며 맹활약, 한국의 원정 사상 첫 16강을 견인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며 폭넓은 활동량과 뛰어난 축구 지능으로 2선의 핵심이었던 그는 마른 체형으로 ‘뼈정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듬해 상무에서 팀 사정에 따라 공격수로 변신한 그는 26경기에서 18골을 몰아넣으면서 ‘뼈트라이커’로 진화하기도 했다. 2012년엔 15억 원을 받으면서 전북 현대로 이적, 그해 ‘연봉킹’으로 거듭났다. 다만 당시 그의 존재 가치를 고려하면 선수 막바지는 크게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전북에서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한 그는 2013년 여름 팀을 떠났고 이후 아랍에미리트(UAE) 알 샤르자 등을 거쳐 2016년 태국 프리미어리그 BEC 테로 사사나 유니폼을 입었으나 입단 3개월 만에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입으면서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해 3월22일 울산문수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볼리비아의 A매치 평가전 땐 대한축구협회 주관으로 국가대표 은퇴식을 하고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화려한 전성기와 비교해서 막바지 아쉬웠던 행보와 관련해 김 감독은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그는 15일 K리그 U-18 챔피언십이 진행 중인 경북 포항시 팀 숙소에서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중동(UAE)에서 나오고 1년 6개월 정도를 쉬었다. 그리고 (오퍼를 받아) 태국으로 가서 선수 생활을 지속하려고 했다. 한 달 정도 몸을 만들고 실전 경기를 뛰었는데 발을 높이 들고 착지 과정에서 십자인대를 다쳤다. 팀에 간 지 3개월 만이었는데…”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그래도 30대 초반까지는 선수 생활하면서 큰 부상을 당한 적이 없었다. 감사한 일이다. 지난해 대표팀 은퇴식도 치렀고…”라며 후회 없이 현역 시절을 보냈음을 강조했다.
어느덧 남아공 원정 16강을 해낸 지 10주년이다. 그는 “당시 (군인 신분으로)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 사진을 보니) 머리를 더 짧고, 단정하게 자를 걸 그랬다”고 웃었다. 공교롭게도 인터뷰한 이 날 새벽 10년 전 월드컵 무대에서 맞대결을 펼친 아르헨티나 축구 스타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가 바이에른 뮌헨과 유럽 챔피언스리그 8강전을 뛰었는데 팀이 2-8 대패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메시 얘기를 꺼내자 김 감독은 “축구는 참 분위기인 것 같다. 한 번 그렇게 무너지면…”이라며 어느새 지도자 포스가 느껴지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인천 출신인 김 감독은 지난해 고향 팀에서 지도자로 데뷔했다. 인천 유스 대건고 사령탑을 맡아 첫해부터 전국체육대회와 문화체육관광부장관배 등을 제패했다. 그는 “축구를 시작한 곳도 인천이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곳도 인천이 됐다”며 “선수들이 운동장에서 뭉치는 힘이 강하다. 내가 왔을 때도 그런 부분에서 강점을 발휘해서 좋은 결과가 바로 나왔다”고 말했다. ‘2년 차 지도자’가 된 만큼 올해는 자신만의 색깔을 더 입히기를 바란다. 김 감독은 “확실히 2년 차에 생각이 더 많아졌고, 어려워졌다”며 “끊임없이 상대를 압박하면서 공격적인 축구를 하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흔히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 지도자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최고 수준 퍼포먼스를 해낸 지도자인 만큼 각양각색 스타일을 지닌 선수를 한데 모아 제 색깔을 내는 게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이런 견해에 대해 “사실 없진 않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눈높이를 낮추려고 한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도, 세계적인 선수도 다 한다. 그저 운동장에서 적극성을 본다”며 “즐겁고 활기차게 해야 발전하는 속도도 빠르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선수 시절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한 건 유스를 지도할 때 큰 도움이 된단다. 김 감독은 “(여러 포지션에서) 내가 몸으로 느낀 게 있기에 공을 지닌 선수 외에 다른 선수의 움직임도 많이 강조하는 편”이라고 했다.
김 감독은 선수 시절 매우 조용한 편이었다. ‘감독 김정우’의 모습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쉽게 말해 잔소리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편이다. 그는 “꼭 해야 할 말, 필요한 말을 한다. 경기 중에도 여러 지시를 하면 선수들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면서 “특히 유스 선수들은 딱 한 번 제대로 얘기할 때 와닿을 수 있지, 지속하면 잔소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팀 성적을 떠나서) 훈련장이든 생활이든 선수들이 즐겁게 축구를 대하는 분위기 만큼은 (대건고에서) 남기고 싶다”면서 제2 축구 인생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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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조형애, 이종현]
과거엔 K리그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를 ‘용병’이라 칭했다. 시대는 변했다. 단순히 돈을 받고 뛴다는 의미의 ‘용병’으로 그들을 취급하거나 대하는 일은 이제 없다. 하지만 여전히 리그에 미치는 영향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K리그 37년사, 오랜 시간 주목받지 못했던 외국인 선수들의 발자취를 따라 밟았다. 그리고 <포포투>가 그중 열다섯을 엄선했다.

[스포츠서울 박준범기자] 공격도 된다. 포항 스틸러스 ‘캡틴’ 최영준(29)은 팀 상승세에 숨겨진 공로자다.
포항은 FA컵 2경기를 포함해 5승1무로 무패행진을 달리고 있다. 지난 15일 상주시민운동장에서 열린 FA컵 16강전에서 상주 상무를 연장 접전 끝에 3-2로 꺾었다. 리그에서도 3연승은 중단됐지만 패하지 않고 있는 최근 흐름이다.
이 날 2골을 넣은 일류첸코가 승리의 일등공신이었지만 최영준의 득점에도 큰 의미가 있었다. 그는 후반 20분 일류첸코가 크로스를 욕심내지 않고 뒤로 내준 공을 오른발 중거리 슛으로 연결해 상주의 오른쪽 골망을 세차게 흔들었다. 1-2로 뒤진 상황에서 터진 소중한 동점골이었다. 최영준의 득점은 경남시절 이후 처음이다. 그만큼 귀하다. 그의 주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이기에 공격 가담이 그리 많지 않다. 득점보다는 수비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올시즌에는 조금 다르다. 그의 중원 파트너 중 한 명인 오닐이 출전을 하게 되면 수비적인 역할은 오닐이 맡고, 최영준은 한 발 전진해 공격적으로 나선다. 전진 패스 시도도 늘었다.
최영준의 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임대생으로는 이례적으로 주장이 됐다. 여기에는 김기동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기에 가능했다. 김 감독은 현역시절 달았던 등번호 6번을 최영준에게 권유했다. “6번을 받고 뛰면 그 정도 활약은 해야 한다”라고 너스레를 떤 김 감독의 말에는 최영준을 향한 믿음과 만족스러움이 동시에 내포돼 있다. 그는 임대 규정으로 인해 전 소속팀 전북전에는 나서지 못한다. 이를 제외하면 리그 10경기 모두 풀타임을 소화했고, FA컵 3~4라운드에서도 선발로 출전해 경기를 모두 책임졌다.
경기장 밖에서는 어린 선수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유력한 영플레이어상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송민규가 목표로 세운 공격 포인트 10개는 부족하다며, 15개로 상향 조정한 것도 최영준의 조언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의 기대 속에 송민규는 펄펄 날고 있다. 또 4년 차 이승모도 최영준의 이끎 속에 알을 깨고 나왔다. 2% 부족했던 이승모는 최영준과 함께 뛰면서 자신감을 찾고 제 기량을 오롯이 발휘하는 중이다. 이래저래 공헌도가 높은 최영준이다.

현역 시절 ‘뼈정우’, ‘뼈트라이커’로 축구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정우(38). 2016년 은퇴한 뒤 약 3년간의 공백 끝에 2019시즌을 앞두고 인천대건고(인천유나이티드 U-18)의 사령탑으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초보 감독의 지난 1년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2년 차가 된 2020년, 김정우 감독의 시선은 한 단계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존의 뼈대 위에서 리모델링을 꾀하다
부평고, 고려대를 거쳐 2003년 울산현대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김정우 감독은 전북현대 시절이었던 2013년까지 237경기에 나서 37골 17도움을 기록했다.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했지만 상주상무에 있었던 2011년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이 때 무려 18골을 기록하며 ‘뼈트라이커’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보다 앞선 2010년에는 태극마크를 달고 남아공월드컵에 참가, 사상 첫 월드컵 원정 16강 달성에 기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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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이후 해외에서 뛰었던 김정우 감독은 2016년 현역에서 은퇴한 뒤 공백 기간을 가졌고, 2019년 대건고 감독으로 축구계에 돌아왔다. 축구 유망주들을 잘 이끌어 프로에 올려 보내야 하는 중책을 맡은 셈이다.
초보 사령탑임에도 김정우 감독은 침착하게 팀을 파악했다. 주변의 조언을 구하면서 고등학교 축구의 특성을 먼저 이해하기 시작했다. 현역 시절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톱스타였지만, 지도자가 된 후에는 자신을 낮추고 귀를 열었다.
“처음 대건고에 왔을 때는 이미 감독을 제외한 코칭스태프들이 모두 꾸려진 상태였죠. 우선 코칭스태프들과 대화를 정말 많이 했어요. 가장 중요한 건 초반부터 팀에 큰 변화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감독이 새로 왔다고 갑자기 모든 게 바뀌면 아이들이 낯설어하기 때문에 기본 틀은 그대로 두고 조금씩 천천히 변화를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적응해나갔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