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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에니오라는 이름으로 수원삼성에 입단했지만 어린 나이에 경험한 첫 해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브라질로 돌아갔던 그는 2007년 에닝요라는 새 등록명으로 대구FC에 입단하며 돌아왔다. 브라질에서 경험을 쌓고 전성기를 맞은 상태로 다시 한국 무대에 도전하는 에닝요는 킥이라는 자신만의 무기를 앞세워 K리그를 압도했다. 2009년엔 전북으로 이적했고 그 뒤 4년 6개월 간 역대 최고의 선수로 평가 받을 수 있는 활약을 펼쳤다. 전북을 상대로 페널티박스 부근에서 파울을 범하는 것은 절반의 실점이나 다름 없었다. 에닝요가 프리킥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이제 녹색 유니폼을 입은 에닝요는 볼 수 없다. 그는 한국 생활을 정리하는 중이다. 23일 에닝요는 전주의 한 카페에서 자신을 아꼈던 전북 팬들과 송별회를 가졌다. 외국인 선수를 보내기 위해 수백명의 팬이 모이는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풋볼리스트’는 지난 6월 에닝요와 가졌던 인터뷰를 뒤늦게 공개한다. 그 시점에 이적에 대한 질문을 받았던 그는 “어떤 돈보다 더 전북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었다. 에닝요가 K리그에 남기고 간 역사에 대한 술회이기도 하다.
바네사 올리베이라-에닝요의 아내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부모님끼리 알고 지낸 사이여서 어려서부터 자주 만났는데 그 뒤에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졌다. 사실 바네사를 처음 만났을 때 다른 여자와 교제 중이었다. 그런데 바네사를 보고는 그 여자와 헤어졌다.(웃음)”
발렌치냐 올리베이라-에닝요의 외동딸. 축구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귀염둥이.
“나의 인생이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해주고 싶다. 동생도 낳으려고 계획 중이다. 발렌치냐가 전북 팬들에게 나 만큼 인기 있는 걸 안다. (Q. 한국엔 어린이날이란 게 있는데 특별히 선물을 해줬나?) 매일 선물을 사주기 때문에 그건 의미가 없다.(웃음) 그날 서울과 경기가 있었는데 아빠랑 손을 잡고 입장해서 같이 사진 찍은 게 특별한 선물이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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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전북현대의 감독. 2009년 에닝요를 대구FC에서 데려와 전성기를 열어줬다.
'한국의 아버지. 친아버지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내가 한국에서 성공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줬다. 다른 감독과 달리 선수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대해준다. 각 선수마다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런 마음을 겉으로도 잘 표현 해 준다. 선수들의 자신감과 동기부여에 정말 중요한 요소다.'
이동국-2009년 함께 전북에 입단해 멋진 파트너십을 보여줬다.
'그라운드 위에서 최고의 파트너. 적어도 축구장에서는 아내보다 더 잘 통하는 사람이다. 기량 면에서 최고다. 아시아에 그보다 더 나은 공격수는 없다. 올 시즌 주장을 맡았단 얘기를 들었지만 그렇게 놀라진 않았다. 이동국은 이미 선수들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 완장이 없어도 주장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완장을 차니까 경기력이 더 좋아진 거 같다. 앞으로 매년 완장을 채워줘야 할 거 같다.(웃음)'
김상식-전북의 베테랑. 외국인 선수들도 잘 이끈다.
'김상식은 큰 리더다. 크고 오래 된 나무와 같은 사람. 말이 안 통해도 그가 좋은 사람인 걸 대번에 알 수 있다.'
루이스-전북에서 3년 6개월을 함께 했다. 브라질 출신으로 둘이 가장 잘 통했다.
'루이스의 빈 자리를 자주 느낀다. 이해심이 많은 바다 같은 남자였다. 늘 보고 싶다. 루이스가 맥주를 좋아하는 데 나는 술을 못해서 같이 마셔주지 못해 미안했다.'
데몰리션-K리그 최고의 콤비. 이동국-에닝요 콤비와 비교된다.
'데얀과 몰리나 둘 다 훌륭한 선수다. 인성도 좋다. 몰리나와는 자주 연락하는 편이다. 기회가 된다면 셋이 같은 팀으로 뛸 수 있을까라는 상상도 해 봤다. 올스타전에서 가능할 거 같았는데 셋이 같이 뽑히지 않아 기회가 안 왔다. 물론 나와 이동국이 데몰리션보다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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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마르-브라질의 차기 축구황제. 새 시즌부터 바르셀로나에서 뛴다.
'최고의 능력을 지닌 선수. 이제 유럽으로 가니까 자신의 축구를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줬으면 좋겠다. 브라질에서만 축구 하기엔 아까운 재능이었다.'
귀화-에닝요는 외국인으로서 최초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뻔 했다. 2012년 초 적극 추진됐지만 여론의 반대와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귀화에 실패했다.
'귀화 얘기가 나왔을 때 정말 한국인이 되고 싶었다. 가능하면 국가대표도 하고 싶었다.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슴은 아프지만 나쁜 감정은 없다. 안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되돌려서 생각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어쨌든 나는 축구를 계속 해야 한다. 잘못한 건 나다. 한국에 와서 한국말을 더 능통하게 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런 노력이 부족했다. 내 옆에는 늘 포르투갈어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런 부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귀화 얘기가 나왔을 때 생각한 건 하나였다. 한국 축구를 위해 도움이 되고 싶었다.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국어를 못하는 내 모습에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왜 내 마음을 못 알아주나 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내 잘못이었고 준비가 부족했다. 한국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다.'
이적-AFC 챔피언스리그에서의 맹활약 이후 에닝요에 대한 아시아 내 다른 클럽의 관심은 높았다. 결국 에닝요는 2013년 여름 K리그를 떠나 중국 슈퍼리그로 가게 됐다.
'올해로 전북과의 계약이 끝난다. 내 몸은 아직 몇 년 더 축구를 할 수 있다. 전북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 얘길 못 들었다. 팬들이 이곳에서 마무리 해주 길 원하는 걸 안다. 주어진 시간 동안 전북에 애착을 갖고 헌신하면 계속 여기서 뛸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질 것이다. (Q. 중동이나 중국 무대에서 뛰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나?) 항상 다른 팀에서 오퍼가 왔다. 그렇지만 한번도 단장님을 찾아가서 전북보다 연봉을 많이 주는 팀으로 보내달라고 억지를 쓴 적이 없다. 전북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도 없다. 전북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다른 팀에서 주겠다고 한 돈보다 컸기 때문이다. 2011년에는 K리그 다른 팀에서도 오퍼가 왔는데 안 가겠다고 했다. 돈을 따라가는 것보다는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이라는 것을 언젠가부터 느끼게 됐다.'
한옥마을-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전주의 명소
'듣기만 했지 아직 가 보지 못했다. 아내는 가 봤다고 한다.'
알 사드-2011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좌절시킨 상대
'내가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하기 전까지 절대 잊을 수 없는 팀이다. AFC 챔피언스리그는 지금 현재 가장 우승하고 싶은 대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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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틀맨-싸이가 강남스타일에 이어 내 놓은 노래. 복귀 후 골을 넣고 한 세리머니
'나? (웃음)'
태극기-한때 그의 축구화에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예의와 예절. 태극기를 보면 늘 떠올리게 된다. (Q. 귀화 논란이 있을 때 축구화에 태극기가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사라졌다.) 그때 축구화에 태극기를 새긴 건 귀화를 염두에 두고 보여주기 위한 제스쳐가 아니었다. 한국에 온 지 오래 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브라질 국기와 함께 축구화에 새긴 것이었다. 부정적으로 보려고 하는 한국 사람들 때문에 축구화에서 태극기도 브라질 국기도 없앴다. 대신 아내와 딸 이름을 새겼다. 내 마음을 확인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려는 생각 때문에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전북현대-K리그에서 그가 뛴 세번째 팀이자 아마도 마지막 팀?
'나의 축구를 인정하고 꽃 피게 해 준 고마운 팀. 나에게 한국은 곧 전주다.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나이가 들어도 절대 잊지 못할 곳이다. 전북 팬들에게 고맙다. 그들이 보여 준 뜨거운 열정이 나를 더 열심히 뛰게 만들었다. 전북 팬들은 최고의 서포터다.'
2013-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