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inho Oliveira Jun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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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사이드] 에닝요의 고백, “나도 모르게 한국사람 돼버렸다” (영상)
관리자 07/31/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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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리스트] 류청 기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자는 두려울 게 없고, 떠나는 이는 숨길 게 없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모두 털고 공항 출국장 앞에 선 이들을 만났을 때, 가장 울림이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3년 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터키로 떠나기 직전의 세뇰 귀네슈 감독(전 FC서울)을 마주했을 때의 진동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의 조금은 쓸쓸한 뒷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다.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7년간의 K리그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에닝요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에닝요는 뛰어난 선수이기에 앞서 기자의 거울과 같은 선수였다. 2007년 함께 K리그 무대에 발을 디뎠고, 성장했다. 에닝요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그의 시원한 프리킥을 보는 것만큼 의미가 있었다. 에닝요가 특별 귀화를 놓고 마음 고생을 할 때는 그의 아버지를 만나기도 했었다.

에닝요가 한국에서 보낸 마지막 3시간은 우울하면서도 빛났다. 여우비처럼, 비가 내리는 가운데 햇살이 비추곤 했다. 에닝요의 한국 생활이 그랬다. 에닝요는 2003년 수원 삼성에서의 실패를 딛고 대구FC와 전북 현대에서 성공 신화를 썼다. 보이지 않는 텃세와 언어 장벽 그리고 귀화로 인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하면서 얻은 성과였다. 전주에서 인천으로 오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는 에닝요는, 녹음기 앞에서도 훌쩍임을 멈추지 못했다.

전북을 떠나 창춘 야타이로 이적하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복잡했다. 에닝요에게는 그랬다. 돈과 좋은 조건을 찾아 움직이는 프로축구 선수가 더 좋은 환경으로 옮아가는 일은 당연하지만, 에닝요에게는 쉽지 않았다. 전북에서 받은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쉽게 한국을 떠날 수 없었던 것. 귀화가 사회적인 이슈가 됐을 때, 많은 이들이 에닝요가 한국어 구사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꼬집었었다. 하지만 언어 능력과 애정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너무나 결정 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프로축구선수인데도 그랬다. 한국 생활을 하는 동안 한국이 너무 좋아졌다. 시즌이 끝나고 브라질에 가서도 부모님들이 샘낼 정도로 한국에 가고 싶은 게 티가 났었다. 처음에는 주위에서 ‘너는 이제 한국 사람이 다 됐다’라고 말했을 때는 사실 몰랐다. 이번에 이적을 결정하면서 깨달았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한국사람이 돼 버렸다.”

흔들리는 에닝요를 붙잡은 이는 아버지였다. 에니오 올리에이라 씨는 축구 선수 출신으로 지금도 브라질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좀처럼 아버지에게 힘든 내색을 하지 않던 에닝요도 한국과의 이별이 가까워오자 브라질로 향하는 전화를 손에 들었다. 에닝요는 “아버지가 내가 프로축구선수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주셨다. 내년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좋은 기회가 왔으니 잡아야 한다고 하셨다. 결국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라고 말했다.

프로축구선수 에닝요는 좋은 결과를 받아 들었지만, 인간 에닝요는 달랐다. 에닝요는 마지막까지 한국의 조각들을 손에 들고 만지작거렸다. 가장 큰 조각은 전북과 최강희 감독 그리고 이동국이었다. 에닝요는 전북과의 이별이 확정 된 후 서포터들이 직접 주최한 행사에서 뜨거운 정을 맛봤다. 그는 “만약 한국 팀에서 다시 나를 불렀을 때, 전북이라면 선택이 쉬울 것이다. 하지만 다른 팀이라면 신중을 기할 것이다. 전북팬들 때문이다”라며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최강희 감독은 한국의 아버지다. 많은 도움을 받았고, 우승컵도 함께 차지했다. 귀화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지지해주셨다. 최강희 감독의 이름은 가슴에 새겨졌다. 고마움이 평생 갈 것 같다. 같이 뛴 선수 중에서는 루이스가 가장 기억에 난다. 한국 선수 중에서는 이동국이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눈빛만 봐도 통했다. 내가 잘해서 전북이 좋은 성적을 낸 게 아니다. 모두가 함께 했다. 전북의 역사를 함께해 정말 기쁘다.”썸네일

에닝요는 쉽게 한국을 떨치지 못했다. 그는 전북 유니폼을 벗고 새로운 소속팀의 유니폼을 입으러 가면서도 지난 ‘2011 AFC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떠올렸다. 전북은 카타르의 알 사드와 접전 끝에 승부차기로 패했다.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골결정력에 눈물을 흘렸다.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에닝요는 경기 당일 응급실 신세를 졌다. 집에서 고열과 호흡 곤란에 시달리다가 앰뷸런스를 탔다.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ACL결승전은 평생가도 못 잊을 기억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이다. 그 때 우승하지 못한 게 한이 돼서 죽어도 못 떨칠 것이다.”


에닝요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특별귀화를 못하게 된 것도, 전북과 재계약이 어려워진 것도, 창춘으로 이적하면서 가족들과 헤어지게 된 것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전북팬들에게 받았던 절대적인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 알았다. 그런데 이별하려니 그 사랑이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이 순간이 슬프면서도 너무 행복하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별은 당사자와 관찰자 모두를 힘들게 한다. 시간은 비행기 이륙을 서둘렀고, 에닝요도 아내와 딸 발렌치냐와 작별해야 했다. 그 때까지 의연했던 아내 바네사는 에닝요와 포옹하면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발렌치냐도 아빠의 목에 매달려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배웅하는 김 원희 대표도 목소리가 갈라졌다. 가장 먼저 중심을 잡은 이는 에닝요였다. 에닝요는 기자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에닝요의 표현을 빌라지면, 떠나자 모든 게 극명해졌다.

“한국 사랑해요.”

에닝요가 팬들에게 남기는 말


2013-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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